베트남 전쟁은 총성과 피로 얼룩진 전장이었지만, 그 뒤에 남은 것은 파괴된 도시나 전사자들만이 아니었다. 전쟁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만들어냈고, 그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또 다른 피해자가 되었다. 미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메라시안(Amerasian)’, 그리고 한국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은 그 전쟁의 인간적 유산이며, 현재까지도 각자의 나라에서 다른 운명을 살아가고 있다.
아메라시안은 베트남전 기간 중 베트남에 주둔한 미군 병사들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그 수는 약 25,000명에서 50,000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미국계 혼혈인으로 외모가 두드러져 베트남 사회에서 쉽게 구별되었고, ‘미국인의 아이’라는 이유로 심각한 차별과 소외를 경험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1982년 ‘아메라시안 이민법(Amerasian Homecoming Act)’을 제정해, 이들 중 약 20,000명 이상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이민 이후에도 이들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미국 사회는 제도적으로 이들을 수용하고 동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장치를 마련해왔다.
반면, 라이따이한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일컫는 말로, ‘라이’는 혼혈을 뜻하고 ‘따이한’은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베트남어 표현이다. 정확한 숫자는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않았으나, 학계와 인권단체들은 수백 명에서 최대 2만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전쟁 후 베트남 사회에서 ‘적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학교조차 다니지 못하고 빈곤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사실상 침묵해 왔고, 아직까지도 공식적인 사과나 보상, 제도적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단지 정책적 대응의 문제만이 아니다. 미국과 한국이 각각 아메라시안과 라이따이한 문제를 다르게 다루는 데에는 역사적, 외교적, 문화적 배경이 깊이 작용하고 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의 주도국이며, 패전국으로서 전후 복구와 도덕적 책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아메라시안에 대한 이민 정책은 전쟁 책임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베트남과의 외교 관계 정상화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전쟁에 파병된 동맹국으로서, 전쟁 책임에 대한 자각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게다가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민간인 학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라이따이한 문제는 더욱 민감한 외교 사안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수십 년간 이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을 피했고, 그 결과 라이따이한들은 제도권 바깥에서 오랜 세월 고통을 견뎌야 했다.
사회문화적 배경도 차이를 만든 요인 중 하나다. 미국은 다인종·다문화 사회로서 혼혈인에 대한 수용성과 정책 유연성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한국은 오랫동안 단일민족주의적 정체성이 강해 혼혈인이나 다문화 가족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부족하고 사회적 편견도 깊다. 이러한 배경은 한국 내 라이따이한 이슈의 제도화와 공적 지원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최근 들어 일부 라이따이한들이 한국 국적을 신청하거나, 생부를 찾기 위해 DNA 검사를 받고 인지 청구소송을 제기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예외적 존재’일 뿐이며, 다수는 여전히 뿌리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의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외면해온 구조적인 문제의 결과다.
이제는 아메라시안과 라이따이한을 단순히 전쟁의 부산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며, 국가는 그들에 대한 책임을 제도와 정책으로 실현해야 한다. 진정한 사과는 말이 아니라 행동에서 비롯되며, 그 출발점은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하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이 남긴 자식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인권과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